부산에서 1950년대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으니, 1학년 입학 때엔 준서할미가 1학년 13반이었으니, 피난 시절이라 그랬는지
한 반에 학생 숫자도 많았고, 반도 여러 반이었다.
그 때 우리반이 끝 반인지? 더 있었는지도 지금은 모른다.
1950년도 우리나라 초등학교에 그렇게 많은 교실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학교 운동장에 국방색 천막으로 만든 천막교실도 있었다.
학교 교문 앞 2차로쯤의 한길 건너편에는 미군과 한국군이 같이 있는 철조망으로 우리가 보초를 서는 것을 볼 수 있는 군인부대도 있었다.
그 부대 안에는 쑥이 지천이어서, 한국군인 아저씨는 고모나 이모를 데려 오면 쑥을 뜯게 해 주겠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 부산생활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 , 그 때는 신학기가 4월이었는데, 그 신학기 첫날 고향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저학년은 모르겠고, 4,5,6학년은 반이 두반이었고, 운동장은 넓었고, 일본사람이 심었다는 큰 겹벗꽃나무가 있고,
벗꽃나무 뒤로는 각반이 채소씨앗을 넣고 기르는 실습지가 있었다.
또 논도 실습지가 있어서 그 논으로 보리이삭과 벼이삭을 주으러 나기기도 했었다.
그랬는데, 시골에서는 하곡이라고 부르는 보리농사를 수확하는 시기와,
추곡이라 부르는 벼농사를 수확하는 가을,
농가가 다 같이 바쁜 계절에 - 가정실습이라고 4~5일 인가? 하는 방학이 있었다.
바쁜 때이니 각 가정에서 아기들을 보던, 심부름을 하던 작은 일손이라도 보태라고 그리 했었던 것이다.
그 바쁜 농사철에는 부지깽이도 일어나 일을 한다고 할 정도로 바쁜 때였으니, 가정실습기간이 끝나고도, 아주 바쁜 집에서는
연달아 몇일은 결석을 하고 동생들을 보는 동무들도 있었다.
가정실습이 없었다면 결석을 할 수 밖에 없었으니 그리 했었지 싶다.
요즈음처럼 밭에서 논에서 콤바인으로 바로 수확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낫으로 벼서 단을 만들고, 사람이 지게나 소 구르마에
싣고 집 마당으로 들일 때여서 수확한 빈 밭, 논에서 이삭을 주워야 하는 것이 필수여서,
가정실습 기간에 우리 어린아이들이 꼭 해야 하는 일은 동생 돌보기와 이삭 줍기였다.
혹여 논밭이 없는 가정에서 어른들이 이삭을 주으러 와도 주인이 다 주운 논, 밭에서 주워 갔다.
그 때는 초등학생이라도 자기 몫의 일을 했다.
봄부터 소풀도 캐고, 풀이 조금 길어지면 낫으로 풀을 베어 오고, 소 풀 멕이러 들로 나가고, 어른들이 날이 부움하게 밝으면
들도 나가셨다, 들어와 아침밥을 잡수시니, 아침 일찍 소 죽도 끓이는 집도 있었다.
준서할미도 소 죽을 끓일 수 있었다.
어른들이 계시지 않으면 어느 집이나 초등 고학년이 되면 소 죽을 끓여 놓고, 학교를 가기도 했었던 시절이었다.
어느 블방에서 오늘 읽은 글 이야기 속에는 자연을 많이 접하게 해 주고 책 읽기를 많이 하게 해 주었고,
학원은 보내지 않고, 자식 눈높이에 맞은 교육을 했더니, 고등학생이 되면서 성적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대학은 결국 좋은 곳으로 보내지 못했음을 이야기 한 글을 보았다.
그런 교육이 바람직한 것 같은데, 현실에서 그렇게 하면 또 성적이 문제가 되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은 없었으니, 이해력이 높은 사람이 결국 공부도 잘 할 수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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