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여행

청송 객주문학관

이쁜준서 2018. 11. 5. 20:09

 

청송 객주문학관은 그 규모가 컸다.

폐교 기숙사를 리모델링한 것이라 했다.

학교운동장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고, 학교 건물은 전시관과 연수관으로 사용 되고 있었다.

청송군에서 운영 관리를 한다고 했다.


 

김주영 작가는

청송 진보가  고향이라 했다. 


진보 장터 가까이 살았고, 학교는 멀었다 했다.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오일장 구경을 좋아 했고, 장날이면 학교를 결석했고, 그 담날 학교 가면

담임 선생님께 배가 아펐다고 했고, 장날이면 으례 학교는 가지 않고, 장 구경을 했더라 했다.

어린 아이 김주영은 장터에서 놀면서,

장터에서 벌어지는 속임수, 폭력, 싸움, 화해, 미움, 또 배려하는 맘, 갈등, 질투, 경쟁 등의

인간들의 온 갖 모습을 보아서 일찍 시건이 들었다 했다.



내 고향 오일장터는 그리 넓지 않았다.

면 사무소 앞의 공터가 오일장터 였는데, 소 장이 장날이면 섰다.

시골에서 그 당시 소가 꼭 있어야 논 밭을 쟁기질 할 수 있고, 무거운 농사 수확물과 거름등을 져다 논 밭으로 나르고,

수확철에는 질메를 메어서 싣고  집 마당으로 들였다.


그리고 송아지를 키워서 중소가 되면 그 이듬해 소 시장에 내다 팔거나  한 해 더 키워서  일소로 하고 큰 소를

소 시장에 내다 팔았다.

큰 돈을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나 같은 아이들은 학교 다녀 오면 비가 악수로 쏟아 지는 날 말고는 들에 벼들을 수확하고 난 뒤 빈들로 소를 몰고

풀 뜯기러 다녔다.

이른 봄  풀들이 파릇파릇 땅에 숨어서 올라 오는 듯 한 풀을 호미를 들고 들판의 논둑이나 밭둑으로 다니면서 캐 왔다.

짚도 썰어 넣고, 콩깍지도, 바람에 날린 쭉정이 알갱이도, 방앗간에서 가져온 쌀을 찧을 때 나오는 고운 등개도 넣고,

쇠죽을 끓이는데 봄이면 그 맛을 더 하기 위해 언손 호호 불면서 소풀을 캐러 다녔던 것이다.

그 풀이 없어도 쇠죽을 끓일 수 있는데도 꾀 내지 않고 풀을 뜯으러 다니다 나중에는 낫으로 베어 오고,

풀들이 많이 자라면 소를 몰고 들판으로 나가서 풀을 뜯기고 했다.


그러나 소는 농가에서 가족 같은 존재여도, 언젠가는 소 시장에 가서 팔았다.

소 시장에서의 소들은 눈을 보면 늘 슬퍼 보였다.

오일장 다른 장사꾼들이 채 도착하기 전에 소 시장은 일찍 소들이 들어 찬다.

학교 가면서 같은 읍내에 있는 소시장으로 들어가 소들을 보다가 학교로 갔다.

어린 나에게는 소 시장의 소들이 슬펐다.



아는 사람 중에 오일장 장꾼이 있다.

한 사람은 30년도 넘게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고 두 자식도 빼앗기고, 1만원도 않되는 적은 돈을 가지고 채소 사다 팔았다 했다.

이제는 장사 하지 않아도 되지만  오일장 중에 하루만 장사를 한다고 한다.

30여년이 넘게 장사 다니던 그 장에서,


한 사람은 50대 후반부터 늦게서야 즉석 오뎅 장사를 다니는 사람이다.

오일장은 비가 와도, 아주 추워도, 눈이 와도 내 자리 비우지 않아야 하기에 장사를 간다고 한다.

장사꾼들의 사는 거리와 상관 없이 아침 7시경이면 물건을 정리 해 놓고 장사꾼들이 모여서 술 한잔이나 간단한 요기를 한다 했다.

하루 중에 소주 한잔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 했다.

추웠던 몸도 녹여주고, 뜨건한 국물로 속도 물어 주고.

그 시간에 술 한잔을 한 것은 장이 파하고  운전해서 집으로 갈 때 음주 운전이 되지 않아서이라 했다.


오뎅장사야 버젓이 자기 자리가 있지만, 자리 다툼으로 번지게 되면 치열하다고 한다.

사람들이 우선은 장꾼으로 모이고, 사는 사람으로 모이고, 흥정하고, 경쟁하고, 매번 경우가 없기도 해서 매번 또 보아 주어야 할

상대도 있고, 온갖 인간군상들이 온갖 형태로 사는 모습들이 현대의 오일장에도 있다고 한다.


그 옛 시절 시골장터에서 장날이면 학교가지 않고  놀았다는 김주영 작가는 일찍 세상사를 보았을 것이다.




김주영 작가가 10부작 ' 객주'를 쓰게 된 계기가 된것은 어린시절 시장가에서 시장 구경을 많이 했고,

인간들의 여러 모습을 일찍 알게 되었고, 객주들의 삶도 어린 시건에도 점점 깊게 알고 싶었을 것이다.


19세기말 조선보부상을 중심으로 민생의 이야기 ' 객주' 를 쓰기 위해서,

보부상들처럼 무거운 짐도 들고 메고 다녀 보았고, 보부상들이 넘어가는 깊은 산골길도 넘어 가고,

몸소 체험한 것을 구상해서 소설 ' 객주'를 쓰신 것이라 했다.

객주문학관에는 다른 크기의 저울 추들이 여러개 전시 되어 있었다.


위의 사진은,

그 때 노트북이 있어 가지고 다닌 것도 아니고, 공책에 잉크와 철필을 뒤로 해서 글을 썼는데,

철필로 쓰야만 공책 한 줄에  두 줄의 글을 적어 넣을 수 있었고, 그 공책을 다시 읽어 보고

수정도 했다고 한다. 그 작은 글씨를.

온 몸을 불사르듯 한 열정과 혼을 불태운 작품 ' 객주' 다 싶었다.


         잉크를 휴대하고 다녀야 해서 아주 작은 잉크병들, 철필들, 카메라들이 전시 되어 있었다.

         실제로 김주영 작가님께서 쓰셨던 것들이다 했다.



 



소설 '객주'에 나오는 순수 우리말을 간추려서 액자에 넣어 놓았는데,

한글이면서도 어려워서 ' 객주 ' 책을 읽을 때 이해가 않되어서 책읽기가 드디다고 했다.

순수 우릿말이기도 하고, 경상도 사투리이기도 한 말을 사진으로 찍어 와서 천천히 보아도 아는 말이 몇가지 되지 않는다.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것은 예전 시골 오일장을 이 장으로 저 장으로 옮겨 다니면서 물건을 팔던 장꾼 정도였는데

보상, 부상이란 단어가 합쳐져서 보부상이라 한다고 했다.

여자들은 주로 가벼운 것들을 머리에 이고  가정 집으로도 팔러 다녔다 하고,

남자들은 주로 무거운 것을 지게에 지고 장을 옮겨 다녔다 했다.

부상의 패랭이에 둥글게 만 솜 2개가 있었다.

급하게 다쳐서 피가 날 때에 사용할려고 준비한 솜뭉치라 했다.




 일반의 지게와 다른 점은?

지게는 높고 지게 다리는 짧았다.

밤에 산길을 가다가 잠이 들었을 때, 산짐승의 소리가 나면 짐을 벗었다가는 다시 지고 일어서기에 시간이 걸려서 생명이 걸린 일이라

지게를 지고 자야 해서 지게 다리가 짧았고, 지게 작대기는 길었다.

좁은 산길을 지날 때 나무들등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한다.

우리 일행 중 청송이 고향이고 이번 청송여행을 기획한 고향이 청송인 사람은,

일년에 서너번 객주문학관으로 와서 기념관 안에서 정원을 내려다 보면서 책도 읽고,

놀다 간다 했다.

혹여 눈이라도 오는 날은 정원의 풍경은 기가막히게 아름답고, 맘을 힐링하게 해 준다고 했다.


청송이란 곳은 이제야 우리도시하고 도로가 새로 생겨서 1시간 30분~2시간이 걸린다 해도,

여전히 그 쪽으로 여행을 잘 가지는 곳은 아니다.

그러니 이번 가을 여행을 청송으로 가자고 하니 다들 좋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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