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부산에 살았다.
지금에사 차라리 예전의 물고구마 토종의 꿀 같았던 그 맛을 찾아도 없지만 그 때는 여름방학
무렵이면 껍질이 발갛고, 양쪽을 칼로 베어서 하얀 속살이 보이고,먹으면 타박타박하면서도 단
고구마를 길에서들 팔았다.
그 색깔만으로라도 먹고 싶어지는 배 고픈 시절의 이야기다.
그리 비싸지도 않았고, 적은 돈으로 요깃거리가 되어서 용두산 공원에서도, 국제시장 골목에서도,
자갈치 시장 노전 한 귀퉁이에서도 팔았다.
아마도 70년대 들어서는 김 반장으로 김밥을 말아서 깁밥장사도,고구마장사도, 찐빵장사도,
떡장사도 옆에 옆에 앉아 팔았을 것이다.
부산은 이곳 대구와는 달라서 산이 많은 관계로 봉지쌀을 들고, 연탄을 한장 들고서,어둠이 짙어지면
힘겨운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오는 아지매들이 많았다.
50년대는 신문지로 벽을 바르고, 돌가루 종이(세멘트 부대)로 바닥을 바르고도 살았다.(판자집에서)
곳곳의 부대 근처에서는 지프차가 가면 "기브미"라 외치면서 차를 따라 가 미군병사들이 던져 주는
껌도, 초크렛도 얻어 먹었던 세대가 우리이다.
그 때의 새끼줄에 꿰어 사온 연탄 한 장은 난방도, 취사도, 따뜻한 물도 다 해결되는 그런 것이였다.
70년대로 들어서면서 나라 살림이 조금 더 나아지면서 한 번에 30장을, 겨울에는 말려서 땐다고
100장을 창고에 두고 살 수 있었고, 80년대 들어서는 나만 해도 한 겨울에는 한 달에 200장으로도
모자라서 겨울들면서 300장을 넣고는 매달 200장씩 보태어 연탄을 말려서 땔 수 있었다.
겨울에야 빨래 삶는 것도 부엌의 아궁이에서 하지만,여름에는 연탄화덕을 마당에 두기에,
빨래를 삶는 날은 따로이 그 1장의 열량으로 많이 할 수 있었다.
먼저 빨래를 분류해서 삶으면 2~3번을 삶고, 흰양말을 삶는 날은 (남자가 3명이었으니) 4번까지도
삶고, 걸레를 삶고, 마지막에는 요강을 엎어 놓고 삶고, 남은 불로는 찜통에 물을 얹으면 학교 갔다
온 아이들 목욕도 시키고, 머리도 감고, 참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연탄 1장으로 말이다.
이젠 단독이라도 도시가스로 전환되고, 구 동네는 도시가스가 들어가지 않아 여전히 기름보일러를
돌리는데, 그 기름값이 어마어마해서 제대로 난방을 할 수가 없다.
지난 구정에 간 큰집에서 예년과 다르게 거실문을 여니 훈훈했다.
안방도 설렁, 건너방도 설렁,거실도 설렁 제사는 추울 때에 많고, 명절이면 아이, 어른 합치면
30명도 넘는 사람들이 추워서 기를 못 폈는데 훈훈했던 것이다.
거실에 연탄 난로를 설치하는데에 5만원이 들었고, 연탄을 하루에 2장으로 따뜻한 물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고,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모른다고 하셨다.
방학이면 데려다 훈육을 시키시는 손자, 손녀에게 군고구마도 구워 줄 수 있다고 하시면서.
연탄 2장으로 그리 훈훈한 겨울이 되는 것을 우리는 기름으로, 도시가스로 편리하면서도
부담스럽고, 따뜻한 구들장이 없는 보조 난방인 전기요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
겨울에도 준서가 춥지 않아야해서 지난 겨울은 실내가 온실 같았다.
그러나 준서가 가고 우리 둘만 있으면 방 하나를 난방을 하고 산다.
전기매트로 보조 난방을 하면서.
300번째의 글이라서 예전 나 살던 시절의 이야기를 올렸다.
그러고보니 시골에서 콩대궁이, 보리짚을 가마솥 아궁이에 불 때던 기억도 웃음으로 떠 올려진다.
청솔불을 지피면 처음엔 연기가 엄청나고, 불이 붙으면 그 화력이 얼마나 세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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