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한 포기님 사진
내 어린 날은 부산의 황령산 아래 초등학교 입학을 했다.
그 시절이 6,25 전댕 후라 부산은 북적였고, 또한 안정되지 않았고, 3학년까지 전학도 몇군데 했다.
그런가 하면 1학년 입학해서 신장염에 걸려서 몇달을 학교에 가지 못해서 9살에 다시 초등학교 입학을
했다.
그러다 초등 4학년( 그 때는 4월이 신학기 개학이였고) 신학기에 맞추어서 시골 아버지 고향으로
전학을 갔다.
시골 학교는 2학년, 3학년, 4학년까지는 오전, 오후반이 있었고, 낡은 목조 건물은 일제시대부터 있었다 했다.
그러니 내 아버지도 그 시골학교를 졸업하셨던 것이다.
부산은 전깃불이 갑작스럽게 나가면 촛불을 켰는데, 시골은 호롱불 하나로 방안을 밝히는데,
얼마나 침침하던지.
그 어두운데서 바느질도 하시고 나도 익숙해지니 학교 숙제도 밤에 했다.
낮에는 소 풀 뜯으러 가야 했고, 학교 갔다 오면 동네 또래들과 호미들고 쇠죽에 넣을 풀 캐러 다녔고,
부산에서는,
미군부대에서 나온 쵸코릿도, 치즈조각도, 따뜻한 밥에 넣어 비벼 먹던 버터도 있었다.
어쩌다 과자도 먹는 날도 있었고, 왕사탕도 점방에서 사 먹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학교 정문 앞에는 하교 시에 칡도 캐다 덩이를 두고 칼로 얇게 베어서 팔기고 했고,
뽑기를 팔기도 했다.
쪼그리고 앉아서 설탕을 녹여 소다 가루로 부풀어 지면 뽑기 판에 엎어 놓으면,
장사가 슬쩍 별 모양을 찍어 주고 굳으지면 그 별모양을 가 쪽을 뜯어 먹으면서 만들어야 하는데,
10번에 9번은 하다가 바삭하게 부러지고,
시골에서는 간식거리는 감자를 캐는 6월에 감자를 삶아 먹었고, 어쩌다 떡을 먹기도 했지만,
귀한 돈으로 사탕이나 과자를 사 먹은 적이 없었다.
보리 농사 수확하고 나면 거의 보리밥을 했다.
양식 될 쌀과 보리쌀이 귀하다 해도 그 시절은 제일 귀한 것이 '돈' 이였다.
장깃장(공책)이나 연필을 산다 하면, 돈을 주는 것이 아니고 계란을 주셨고, 읍내 점방에 가져가면
두말 없이 우리가 필요한 것으로 바꾸어 주었다.
추석 전 초가을에 찐쌀이 나오면, 학교로 가져 오면 대부분 쉬는 시간에 누구것이건간에 한 줌씩 나누어 먹고,
고구마를 캐면 큰 덩이 하나 아이들이 학교 오면서 가져 오면,
하교시에 십여리 길 걸어가면서 돌아 가면서 베어 먹는 것, 집에 가면 감이 익을무렵이면
벌레 먹은 감이 홍시가 된 것을 감나무에 올라가 따 먹었다.
감나무 가지가 연해서 잘 부러진다 해도 초등학교 작은 여자 아이는 겁도 없이 감나무에
올라 갔고, 그 체중에 감나무 가지가 부러 진 적은 없었다.
5월쯤에 뽕나무 열매 오디가 나왔나?
동네에서 누에를 치고 있어 우리 밭둑에도 뽕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다.
우리는 그 때 누에를 치지 않으니 옆집 아버지 6촌 여동생 처녀 고모가 뽕잎을 따는데 따라가면,
오디를 따 먹었고, 검게 손도 입술도 물이 들었어도 시골에서 그 무렵의 최고의 간식이었다.
처음으로 누에를 보았는데 작았던 벌레가 엄청 커졌고, 어느 날 고치를 지었고,
그 고치를 수매하러 간다고 했고,
누에를 치는 방은 침침하고 습기도 있었고 시능거미란 발이 많이 달린 독충의 벌레도 있었다.
블로그 나드리에서 오디 사진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