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여행

고향으로 추억여행 1 - 2014년 9월 20일

이쁜준서 2014. 9. 21. 06:31

 

 

 

하양 연밭

추석무렵부터 햇 연근이 시장에 나오더니  하양 쪽은 연밭이 대 단지이다.

아직 이 대단지 연밭에서 연꽃이 피어난 것을 바로 옆에서 본 적이 없어 아쉽다.

 

부산 부전역이 종착역인 동해남부선 첫차는 오전 7:00시인데, 오늘은 부산 쪽이 아니고

울산시 북구인 호계역으로 가는 것이라 두번 째 차인 7:30분 차를 타고 갔다.

도시철도, 첫차를 탈려면 집에서 이른 아침이고, 계절에 따라서는 새벽 같은 오전 5시 10분에는 나서야 하는데,

첫차보다 30분 늦은 시간이 되니 조금 덜 바쁘긴 했다.

 

 

 

 

가을 들녘은 벼가 익어 가는 때라 각각 색이 다르고, 파란 하늘에 흰구름은 참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서경주 역사에서 정차를 하고  기차가 경주역으로 달리니 이렇게 넓은 들이 한동안 계속 되었다.

예전 신라의 도읍지였으니 쌀을 수확할 수 있는 넓은 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경주 역이 가까워 오니 경주 시가가지가  넓어 지면서 논들이 한동안 없더니

경주역사를 지나서 한참을 달려 가니 논들이 조금씩 더 보이더니 또 넓은 황금룰결을 볼 수 있었고,

넓은 들은 끝나고 계속 논들은 보였다.

 

 

목적지 호계역에 내려서 나가니 반가운 민서할머니가 와 계셨다.

올 해 당일치기 여행은 3번, 1박2일 강원도 여행까지 4번을 만나 여행을 같이 했었다.

 

오늘의 여행 목적은 중산리 고분군과 돌티미 골을 찾아 보는 것이였다.

 

호계역에 내려서 준서할미가 졸업한 농소초등학교를 찾아 갔다.

예전에는 일제시대 단층 목조 건물이었던 교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교실바닥의 나무 판자도 낡았고,

책상도 낡았었고, 건물은 앞 뒤 2동 이었는데 그 건물 자리에 신축을 해서 예전 목조건물이 앉았던 것처럼

앞 뒤 2동의 산뜻한 건물이 있었다.

 

오른 쪽은 넓은 운동장과 학교 실습지가 있고, 오래 된 겹벗꽃 나무가 있던 곳이 단정 했지만,

넓었던 학교 교정이 좁아져 있었다.

 

몇 십년만에 가 보게 되었고, 준서할미가 초등학생인 시절에는 십여리길을 걸어서 다녔었다.

오일장이 있는 날은  소시장까지 있는 작지만, 흥청거리는 오일장이 있기도 했고,

지금도 아!  저자리는....  저 쯤에는.... 등으로 기억이 되었다.

울산에서 오는 시내버스를 타고 중산리 이화부락 앞에서 내렸다.

 

 

아파트 안 쪽에 중산동 고분군이라는 안내판이 있는 곳은 아마도 이 곳도 무덤이었는지?

가늠 되는 곳에 봉분 위에 소나무가 있었고,

정작 예전 상보들 쪽의  큰 무덤과 하천 가까운 곳에 돌무지가 많아서

그 시절 농사지를 땅이 귀했던 시절이었는데도 밭이 군데 군데 있고, 돌무지가 많아서

소 풀 뜯기러 풀어 놓고 우리는 놀기 바뻤고, 어쩌다 땅에 벌집을 모르고 밟게라도 되면

땅벌- 땡피가 도망가도 도망가도 쫒아 와서 벌에 쏘이고,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던,

많았던 돌무지는 2~7세기까지의 예전 신라 쪽의 우리 조상님들의 무덤이였다 한다.

 

준서할미가 어려서는  상보들에는 큰 무덤들도 있었고,

묘사떡을 얻어 먹으려고 묘사 지내는 무덤마다 따라 다녔고, 옷도 허술한 그 시절에

묘사지내는 철에는 겨울은 아니였어도 손발이 시릴정도로 추웠다.

젖먹이 아기를 업고 가도 두 몫을 주어서 묘사떡 얻으러 갈 때는 동생을 업고 갔었다.

 

상보들 논 가운데는 제법 큰 돌무지가 있었고,

지금 생각하니 고인돌 같았는 큰  돌이 있어 그 돌위에 올라가면 높아서 그 위에서 새가 앉는 것을 보기도 했었다.

발굴된 안내를 보면 그 상보논들도 결국은 유적지였던 것 같다.

 

상보들의 큰 무덤도, 돌무지 무덤도 발굴되고, 아파트가 지어져 있었다.

검색으로 보았던 무덤 몇기가 있고, 가 쪽으로 울타리를 한 무덤은 못 보고 왔다.

중산리 고분군 중에서 몇개의 무덤을 한 곳에 모인 곳으로 검색 되는 것은

아파트 뒷쪽 예전 상보들의 뒷쪽에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일정이 빠듯해서 들어 가지는 못했었다.

 

 

사진

안내판 1

 

안내판2

안내판 1과 안내판 2는 다른 장소에 세워져 있었는데도 글 내용은 똑 같았는데,

그렇다면 안내판2가 세워진 곳도 작은 야산 산속 무덤을 다 발굴을 했단 말인지?

 

 

돌터미골을 찾아 올라 가는 곳은 계단식 논이 있었고, 봇물이 내려 가는 봇불 도랑은 예전처럼 물이 흐르고 있었다.

농사 지를 때는 윗 논, 아랫 논이 집성촌이였으니 아재비이고, 조카이고, 사촌이고, 육촌들이였는데도,

가뭄에 아랫 논에서 윗논 물꼬를 조금이라도 열어 놓으면

아무리 한 동네에서 늘 보는 친척이라도 다시 안 볼듯이 싸우기도 했었고,

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풀리고,

저 봇물은 어디에서 내려 오는지가 그 때도 궁금했는데, 여전히 봇도랑의 물을 흘러 내리고 있었다.

 

 

열어 놓은 물꼬로 물은 흘러 아랫 논으로 흐르는데도 예전에는 미꾸라지들이 보였는데,

그냥 물만 흐르는 듯 흐르지 않는듯 그렇게 흘러 내리고 있었다.

이 계단식 논에는 준서할미가 뛰어 다니면서가을이면, 메뚜기도 잡고, 논고등도 잡고,

가을이 끝나고 나면 소를 풀어 놓으면 소들이 논둑 위 아래로 다니면서 풀을 뜯던 곳이다.

이 계단식 논이 있는 곳으로 참으로 많이도 다녔던 곳이다.

 

계단식 논은 2차 산업단지?라 하던가 조성하는 큰도로를 내는 높은 축대로 끝이 났고,

큰도로에 올라가서 찍은 사진인데, 이곳의 계단식 논은 다랭이 논이 아니고,

봇물도 있고, 각각의 논은 제법 넓었다.

드디어 찾은 돌티미 골인데, 큰 길 쪽에서는 철조망과 벼랑이 있어 넘어 갈 수 없었고,

예전 지명처럼 이렇게 큰 돌들이 많이 있었던 곳이였는데 그 산을 가로 깎아 도로가 생기고

인물 잘난 바위들은 다 깨어서 공사장 밑으로 들어 가고 돌계단을 만드는데 들어 갔다고 한다.

큰 바위들은 역사는 2억년이 넘었다 하고, 약수습지에는 보호해야 할 자연습지라 했었는데,

일부 남아 있다는 습지를 찾아 볼려는 것이 제일 큰 목표 였는데, 4차로 도로 공사는 많이 진척되었어도 공사를 하고 있었고,

가드레일과 철조망과 급하고 높은 경사지로 내려 갈 수 없었고,

올 해는 이미 가을이고 내년 봄을 기약을 했습니다.

 

 

 

큰 바위를 깎아서 만들었음직한 4차로 도로에서 내려 오는 돌계단

중산리 고분군도 2~7세기까지 큰 봉분으로 된 무덤도, 무덤이라고 생각지 못하는 돌무더기였던 무덤도,

보존 했더라면 우리들의 유산이 대대로 내려 갔을 것을

발굴을 해서 발굴한 대학으로 유물은 가져다 전시하고,

그 터에는 아파트가 들어 서 있는 허망한 현실을

어찌 중산리 고분군이라는 안내판을 세워 놓았는지?

 

돌티미골의 저 큰 바위들의 뭉쳐 있던 있었던 바위군들은 4차선 도로를 내면서

산도 잘려 나가고 바위들은 부수어져서 공사장 밑에 깔리고, 돌계단을 만드는데 들어 가고 했다는데,

2억년 자연 유산인 바위가 남아 있는 산 앞쪽에는 얼마간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4차선 도로에서는 이 사진 한장의 바위만 보였다.

 약수습지도 반이상은 훼손이 되었다  했다.

 

잘 보존 관리하면

우리 대대로 물려 줄 문화유산인곳이다 싶으니 참으로 아쉬운 여행이었지만,

호계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가서 마을버스도 타고 다시 돌아서 마을버스를 타고 시내버스를 타는 등의 길을

민서할머니께서 안내를 하셔서 볼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둘이서 타박 타박 걸어도 즐거웠고,

같이여서 계단식 논을 바라보는 맘이 더 즐거웠고,

개발 된 내 고향의 모습이 마땅치 않았지만,

여행자체는 즐거웠고,

모화에서 그 시내버스를 바로 타고 가시라고 했는데도,

같이 내려서 호계역에서 배웅을 해 주셔서 민서할머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