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벨이 울린다.
종일 일을 하고 있고, 세곳의 꼭 받아야 할 전화 통화도 있고, 전화기를 챙긴다.
전화벨이 울리고, 받았더니,
시골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들깨 부탁을 했더니,
공판장에 수매 하는 가격이 매일 1만원씩 오르더니 12만원에 10Kg 샀다고 했다.
우리 동네에서는 제일 잘 된 들깨인데도 일기가 맞지 않아서 아주 충실하지는 않다고 했다.
결혼식날이 음력 정월 그믐 날이고, 그 다음 날이 음력 바람 달인 이월이었다.
바람 달에 새 사람 들이는 것이 아니라고 그 시절에 택시를 타고 결혼식 당일날 시댁으로 왔다.
그런 결혼식 올리고 바로 시댁으로 그날 오는 것을 맞잔치라 했다.
이 도시는 결혼 전에 알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남편 한 사람 믿고 결혼을 해 왔다.
시어머님 친구분들께서 남편도 없이 며느리 보고 맘 힘들까 싶어서 시어머님 으샤 으샤 해 준다고
비단 홀치기 틀 가지고 밤이면 우리 집으로 모이셨다.
간식거리 챙겨 드리고 우리 방으로 가면 될 것을 신랑과 함께 둘이서만 있는 것이 눈치 보여서
가실 때까지 그 방에서 둘러 가면서 하시는 이야기 듣고 추운 겨울날 대문까지 인사 하고서야
우리 방으로 올 수 있었다.
발이 하도 재려서 자세 바꾸어 앉으면서, 속으로 시집살이도 이 시간들만 아니면 할 만 한데 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지내면서 시어머님 친구분들과 사람 울타리가 만들어졌다.
친정가서 몇일씩 있다 첫아기 낳아 업고 양손에 짐들고 우리 동네로 들어서면,
골목에 계시면 아기 받아 안으시고, 양손의 짐 들어 주시고,
나보다 앞 서서 우리집으로 들어 가셨고,
시어머님께서는 친정에서 가져온 차반 음식 채려 내시고,
이사 오기 하루 전날 밥에 박카스 한통 들고 하직 인사 돌았는데,
인사 드리러 가서는 그분들도 나도 눈물 흘리기도 했고,
봄이면 입맛 없는 계절에는 찹쌀 수제비 해서 대접 하기도 했고,
정구지 맛나는 철에는 풋고추 알싸하게 넣고 전 구워서 막거리 한 주전자 사 드리기도 했고,
운동회, 소풍날에는 김밥 넉넉이 사서 드리고 가기도 했고,
우리 아이들 골목에 나가면 더운 날은 하드 사주시기도 했고,
추운 날은 어묵탕 솥에서 어묵꼬쟁이 들려 주시시고 했고,
그 시절 그 동네에서 같이 산 친구에게 들깨를, 건고추를 올 해도 친구는 사서 내 집 앞까지 가져다 주었다.
올 해는 마늘이 좋다면서 마늘도 사 주었고.
그 때 같이 살았던 친구들과 모임도 있는데, 시골이 고향이지 않은 사람은 나 밖에 없으니 나에게만 사 준다.
신혼 때부터 아기 낳고 같이 산 것이 10여년 그러면서 울타리가 생겼다.
그 울타리는 40여년을 넘어서고도 튼튼하다.
어느 해 11월 경주 보문 호수가에서의 산책
11살 차이가 나는 이모님, 7살 차이가 나는 외사촌언니,
2박 3일의 일정으로 경주 여행시에
가을은 짧지만 가장 많은 추억을 남기고 가는 계절
이 동네에서 살면서 지금의 이웃 친구도, 이사를 간 또 한 친구와, 셋이서 일년에 세번쯤 만나는 친구도 있고,
이런 저런 이유로 친구가 된 사람들도 있다.
그 친구 중에 나보다 9살 적은 친구는 같은 부산댁인데, 돋데기 시장 같은 분위기 곳에서 만났다.
손주 둘을 제대로 키워 주어야 한다면서 그 친구 남편이 의논 없이 합가를 정했고,
큰 손주가 6학년인 지금까지 함께 산다.
어느 여름 날 아주 많이 힘들어 할 때 열무, 얼갈이 합해서 10단으로, 열무김치 자박하게 담아서
그 친구 한통, 나 한통 나누었던 적이 있다.
맘이 많이 힘들 때 위로가 될려나 해서.
그 친구 남편께서도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하셨고, 직장도 부산에서 시작 하셨던 분이신데,
이 도시에서 나이 지긋해서 ' 당신 언니' 를 만날 줄이야라 하더라 했고,
같이 모임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우리 둘은 일년에 따로 두어번은 만난다.
정해 놓은 것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서로가 밥값, 차 마시는 값, 영화관 표 사는 값을 내면서,
사람 울타리는 그렇다.
언제 어떤 부탁이라도 내가 해 줄 수 있으면 해 줄 수 있는 그런 맘인 사이인 것이다.
지금은 그래도 서로가 살만하고 그런 평등이 유지 되는 가운데 사람 울타리가 생기는 세상이다.
예전 우리 할머님이 계시고, 우리 어머님들이 며느리였던 세상은 달랐다.
내 가족이 아니고, 그냥 고향 찾아 온 사람이 고향이 친지가 살고 있지 않아서 그 중
인심이 있는 집으로 시외버스 막차 타고 내려서 터들 터들 걸어서 동네 어느 집에 밤 중에 도착하면,
우선 반기고 그 밤중에 가마솥에 밥 한 그릇 불때어서 짓고, 반찬이라고는 김치가 한 가지가 나와도
꿀맛으로 손님은 먹고, 또 뜨신 방에서 재워 주고,
사람 사람간에 이해 득실 따지지 않고, 사람 울타리는 따뜻했다.
우리가 살아 왔던 , 우리 세대가 자라 왔던 세상은 그리 했다.
블로그 이웃 어느 선생님 방에 올려진 글을 읽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참 지금의 세상에서는 성공하기 위해서 정말로 밑바닥부터 고생을 하고 올라 가는 직업들도 있고,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한 오늘 날이 되니 부모, 형제도 몰라하고 살아 왔는데( 라면 하나로 4쪽을 내어서 한끼 먹던 시절이라)
성공하고 나니 걸차고 멋진 곳에서 대접 딱 한번이라도 하고 싶은 어머님은 벌써 저 세상 가시고,
주위가 외롭다는 이야기였고, 실상 나도 그 방송을 보았었다.
지금 세상은 선배도, 후배도 있고, 또 그런 세상에서 따뜻하게 배려 해 주는 사람도 만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가 잘 없고, 내가 정말로 세끼니 식사도 어렵고, 전철 탈 돈마저 어렵다는 것을 주변에서 알면
그나마 섞일 수 있는 기회 조차 어려워 질 것이 대다수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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