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은 것?
6.25 전쟁으로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렸다
서울로, 자기들 고향으로 떠나고,
그 후도 미군들은 한국군과 함께 한 부대
근무 했고 그 부대는 우리 학교 교문과 부대 차량이 드나드는 문이 비켜 마주 보았다.
하교 길에 미군 스리코트가 지나가면 우리들은 기브미 기브미를 외치면서 차를 따라가면
껌이나 쵸코렛을 던져 주었다.
하교길 교문에 나오면 교문 앞에는 봄철에는 굵은 암칡을 가져다 놓고 칼로 살짝살짝 베어서 팔았고,
국자에 설탕을 녹여
뽑기를 팔았고.
오징어게임이란 것의
그 뽑기가 참으로 오래 된 것이다.
운동장에서 여자 아이들은 고무줄 놀이가
제일 즐거웠고,
남자 아이들은 그 고무줄을 끊어 놓고 도망 가는 것이 제일 아슬아슬 하고 즐거웠을 것다.
왜 아슬아슬 하냐면
화가 난 여자아이들이
정말 화난 감정으로
등짝을 때렸으니까.
그러다 초등 4학년 때
아버지 고향이자
실제 내가 태어난 곳인
깡촌으로 전학을 갔다.
특활활동은 전학년을 상대로 희망대로 반 편성이 되었는데,옆반 담임선생님 반이였는데,
3주 째 수업에서 나를 지목 하시면서 너무
집중해 보아서 수업을 못 하겠다 하셨다.
그런가 하면 우리 담임선생님께서 바른 자세에 대해 이야기 하시면서 내 이름을 부르시면서 저렇게 앉아야 한다고 칭찬 하셨는데,
친구들에게 칭찬 받은 것이 부끄러워서 삐딱하게 앉으려 해도 바로 앉아 지는 것은 고쳐지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전업주부로 살았으니 아기 키우고 많은 시댁식구들
과 살면서는 일이란 책 읽거나 공부 하는 것처럼 집중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동생2명, 시누이1명 결혼해 나갔다 하나
아기들이 생겨 나고
명절이면 형제들 식구만 해도 13명이 모이고,차사때는 30여명이 넘게 모이고,
결혼 해 독립했다고 해도 김장김치를 해 주었으니 배추 100포기를 절였다.
김장채소 시장으로 가면 자경농들이 팔러 나와 있고, 리어카에 실어 배달 해주는데
버스 3정거장 거리를
뒤에서 밀어 주면서
배추를 사 왔다.
공부 하듯 집중해서
하는 일이 아니어도
일이 많으니 일머리가
있어야 일을 쳐 낼 수 있었으니 긴장 된 생활이었다.
아기 준서도 데려와
돌보면서는 3층 집에
옥상 계단까지 있으니 혹여 아기 다칠까 싶어서 손잡고 내려가다
혼자 내려 가겠다 하면
내가 뒤로 내려 가면서
아기 준서를 막듯 하니
비켜 비켜 했고,
빨래는 늘 많으니 아기 준서를 데리고 옥상에 올라가서 널고 남은
세탁한 빨래를 또 가지러 내려 오면서 아기 혼자 옥상에 못 두니
그 아장거리는 아기를 데리고 옥상으로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젠 꼭 해야만 하는
바쁠 것이 없다.
옥상정원 일도 매일 해야하는 일정한 일거리도 있고,
느슨하게만 살지는 못 한다.
긴장과 재빠름는 젊었을 때와 비교 하면 잃어 버렸다.
그러나 많은 포기를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하면서 일을 하면서 에너지도 얻고,
행복 해지기도 한다.
행복은 긴 것이 아니고, 밖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고 짧은 순간이 이어지는 것이고,
내가 포기 해 가면서
지금 할 수 있는 것으로 행복 해 지는 것이다.
시어머님께 간혹 전화를 드리면 에비 일좀시켜라.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아기도 보고 설거지 청소 다 한다 하셨다.
올해는 남편 바라지 하는 것을 스스로 하게 두고,
내가 션찮아서 음식종량제통,종량제 봉투
재활용통이 차면 버리기를 남편이 도와 준다.
친구가,
운동 하는 곳에서 들었다면서 팔 아픈 것을
잘 보는 곳이 있다 해서 저번 주는 의사선생님 휴가이고 어제는 갔더니 오후 2시부터
진료라 해서 오늘 다시 갔다 왔다.
어찌나 손님이 많던지?
대기하고 있는데 진찰실 간호사가 추천 받고 어제 오셨던 분인가 물었다.
의사선생님이 참으로 암담한 이야기를 하셔서 혼자 말로 궤도 수정을 해야 하나?
하는 말을 들으시고는
살면서 궤도 수정 없이
사는 사람이 있나요라고 친절하게 이야기 하셨다.
어제 저녁 때는 매미가
현관문 앞 키큰 나뭇가지에 붙어서 울더니
이내 날아 갔다.
그 아이들은 궤도수정이 아니고 자연사를 하겠지만.
라이프분야 크리에이터라 되어 있네.
티스토리 운영진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