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 노지 월동을 한 명자나무가 꽃눈을 열고 꽃몽오리를 부풀리고 있다.
가지가 한창 꽃을 피울려고 물기를 올리는 중이라 반지르 윤가가 난다.
그 윤기는 생명의 기인 것이다.
준서할미는 이런 세대이다.
6.25 전쟁이 휴전 되고 난 후 그 혼란기 부산으로 부산으로 전쟁 중 피난민들이 모여서 살았고,
서울 수복이 된 후 고향 찾아서 가고, 서울로 돌아 가고 여전히 혼란스러운 사회였고,
미군 군복을 염색해서,
그 천으로 까만 교복을 지어서 입고 다니기도 하고, 그 구제품 양복이나 양복 바지를 고쳐서 파는 시장의 가게 앞 길을 다니기도
했었던 세대이다.
영화 해운대에서도 나왔던 시대 배경으로 나왔던 한 장면 같은 세월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했었던 세대이다.
동남아 어디에서는 철도길에서 장사를 하다가 하루 몇번 지나가는 열차가 오기 직전에 싸이렌이 울리고 순식간에 장사 하는
물건을 치우고 섰다가 열차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 좌판을 펴고 언제 그랬더냐?는 듯 시장 길이 되는 것이 관광 코스에 들어 가던데,
그 당시 준서할미 어린시절 부산에도 철길 바로 곁에 양쪽으로 니모(양철) 다라이나 목기로 된 반티란 생활도구에 주로 금방 요기가 되는
떡, 단술, 묵등등을 팔고, 기차가 지나가면 각자의 물건을 들고 비켜 섰다가 다시 앉고 하는 그런 시절도 있었다.
나중 준서할미가 고등학교 시절에는 철로는 있었지만, 기차는 다니지 않았고. 음식 장사들이 꽉 차고, 사 먹는 사람들도 꽉 차고,
배 고픈 사람들이 작은 돈으로, 요기 하기 딱 좋은 곳이였다.
준서할미가 좋아 하는 그곳 음식 중에는 봄이면 쑥인절미에 기피 고물을 묻인 떡과, 당면 부스러기를 삶아서 뜨근뜨근하게 니모 다라이에
담아서 솜을 넣고 누빈 보자기를 씌워서 따근한 당면에( 그 시절은 일반 생활에 비닐이 없던 때) 진간장으로 양념장 만든 것을 얹어 주면 비벼 먹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그렇게 장사하신 우리들 엄니 세대분들은 돌아 갈 때는 쌀 한봉지를 사고, 연탄 상회에 가면 새끼 줄에 꿰어진 연탄 한장
사고 그렇게 산 동네를 올라 갔었던,
전기가 각 가정에 들어 왔긴 하나, 자주 정전이 되어서, 심지가 석유를 빨아 올려 유리로 만든 덮개가 덮어져 있고 그런 호야란 도구가 각 가정에 있었다.
수도는 그 때는 각 가정까지 들어 오지 않았고, 너른 마당( 넓은 공터)에 공동 수도가 있었고, 24시간 나오는 것이 아니라서
물 받을 그릇도 줄 서고, 사람도 줄 서고, 새치기를 했다고 싸움은 빈번했고, 그렇게 물을 받아 먹던 시절에
집 안 마당에 샘을 파면 도깡 2개를 포개어 얹을 정도만 파도 물이 나왔는데, 소금기가 있어서 청소하고 설겆이 정도만
할 수 있었다.
부산의 평지에서의 집인 경우였고,
준서할미가 고등학교 시절에는 산 동네까지 수도가 들어 와 있었다. 가뭄이 길면 수압이 낮아져 산 동네 까지는 수도물이 올라 오지 못하긴 했었어도.
부대에서 군인들 식재료인 두부와 콩나물이 어떻게 나왔는지 구멍가게에 있었고,
흔하게 군인들이 운전하는 짚차에 높은 계급의 남편을 둔 사모님들이 타고 다니는 것도 보았는데,
그 시절은 휴전이 되었다 해도 준 전시라 혼란한 시기여서 그랬을 것이다.
도시는 반티 하나에 고구마를, 김밥을, 떡을, 당면부스러기 삶고,양념장을, 단술과 묵을 해서 시장에 내다 팔면,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 받아 팔기도 하고, 큰시장에서, 기차역 넓은 마당에서 지겟군을 하기도 하면,
식구들 끼니 이어가고, 자식들 공부도 시켰던 그런 세월이었고,
그래도 도시 살림은 점점 나아져서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나아졌다.
시골이건, 도시건 그래도 사람 도리도 하고, 수 인사도 제대로 차리고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사셨던 것이다.
도시 공장 다닌다고 그 얼마나 번다고, 그래도 명절이면 고향 찾아 오면서 부모님 옷도 사 오고 동생이나 조카들 옷도 사 오고
대소가 어른들 반찬거리 생선도 사오고 사탕이라도 한 봉지 대소가 노인분들에게 들고 인사 갈 정도로 왔었기에,
준서할미 어린시절에는 도시에 나가 사는 삼촌이나 큰아버지들은 아주 잘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2016년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쌀밥에 기왓집은 벌써 해결이 되었고, 집집마다 넘치는 것이 옷이여서
새옷이 헌옷으로 버려지고 어찌 밥을 몇일씩이나?
밥이 질린다면서,별식을 사 먹으러 나가고 집으로 배달 시켜서 먹고 사는 때인데,
제대로 수인사도 못하고 살고들 있기도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난 사람들이어서 그런 줄 알고 잘 못 살기도 한다.
그런데 인사를 제대로 하게 배우면, 그 태도에서 품성이 나타나고, 거기서 한 발 더 나가서 다른 사람을 배려 할 줄 알면
스스로 당당해져서,다른 사람이 함부로 대 하지 못하는 기도 은연중 가지게 되는데 그것을 못 배우고 엄마가 되는 사람도 많은 가 보다.
그런 품성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면 돈 주고도 사지 못하고, 단박에 가질 수도 없는 자기 재산이 되는 것이거늘.....
일요일 띠동갑인 사촌동생 딸래미 결혼식에 갔었고, 집안 행사가 있어도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가 혼주가 된 그 맏이만 데리고
다니시다가 그 밑에 딸이 성장하고는 위로 남매만 데리고 다니셨다.
그러니 즈그들이 결혼을 했었어도 잔치나 상사가 일어나도 위로 남매가 참석 하고, 밑의 동생들이나 며느리는 오지 않아서,
그날의 혼주인 사촌 올캐는 얼굴을 첫 아기 낳아 조리할 때 서울의 작은어머니와 함께 봉투 하나 들고 고향으로 찾아가 보았을 뿐이였다.
(서울의 숙모와 지방도시의 질녀가 만나서 고향의 조카가 첫 아이 낳았다고 축하 하는 걸음을 했던 시절이었고)
당연 얼굴은 모르는 것이고, 손님은 줄 서서 인사하고 부조 주고는 축하 한다는 인삿말 한 마디 할려고 기다리다 사촌 동생 손 잡고서
축하 한다 이따보자하면서,
식장으로 들어 가는데 혼주인 올캐 되는이가 자기 앞으로 지나 가니 살짝 웃으면서 눈인사를 했다.
당연 모른다 생각했고, 나도 목례를 했었고,
식이 끝나고 작은 어머니께서 손주들 인사를 시키고, 작은며느리도 인사 시키고 하는데, 앞에서 알짱 대기만 하고 혼주인
올캐가 인사를 하지 않아서 자네도 인사 해야지라고 웃으면서 말을 건네니,
" 아까 인사 했잖아요" ( 어라 싶었고)
그랬다면 아까 알아 보고도 " 형님 오셨습니까?" 딱 말 한마디는 할 여유가 있었는데, 그렇게 눈 인사만 했던가? 싶어서
"그것도 인사라고? 아까는 식 시작 전의 인사고, 이제는 식이 끝났으니 인사해라"
즈그 큰 시뉘인 준서할미보다 15살? 살 정도 적은 아이가 언니 시뉘값 할라고? (웃으면서)
" 그래 내가 보통 시뉘가? " 하는 말이 모두를 웃게 만들었지만.
준서할미를 우리 엄니가 잘 키워 주신것에 감사한 것 중에는 어려서도 스스로 일을 찾아서 했고, 나를 남에게 비교 한 적이 없게
키워 주신 것이다. 정직한 것을 제일 위에 두고 훈육 하셔서 자존감이 어려서부터 있게 키우신 것이다.
배 고프던 시절을 살아 온 준서할미는 이 세상에서 배 고프지 않고, 단정하게 입을 옷만 있으면 그것이 최소한이고, 그 최소한이
해결되면 그 또한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살다보면 최소한이 해결되고, 더 맛난 음식도 먹어야 하고, 더 고운 옷도 입어야 하고, 여러가지 구경도 다녀야 하고,
그렇게 즐기면서 살기도 하고, 그러면서 앎도 늘어나고, 남을 배려 할 줄도 알면서 나이가 들어 가면서 품격이 있어 지는 것이다.
배 고프지 않고, 옷 헐 벗지 않으면 최고라 하는 준서할미도 국내여행, 외국여행 많지은 않아도 다니기는 한다.
그러나 살아가는 것에서의 가치를 아는 것이다.
각자가 자기 할 일을 자기가 찾아서 하고, 그럴 수 있으니 배려감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고, 그렇게 살다보니 인생의 가치관이
나이가 들면서 격이 있는 사람으로 되어 가는 것이고,
그런 엄마가 키운 자식들도 반듯하게 자라는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