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샘물

사람 됨의 격

이쁜준서 2020. 11. 18. 04:46

꽃 피는 봄이 오면

수사해당화

이 나무가 아직도 건재합니다.

꽃이 피는 봄이 오면 또 추운 겨울 옥상 노지 월동을 하고

꽃을 피울 것입니다.

 

이바지 음식을 배울 때가 20여 년 전이였지 싶습니다.

그때 이웃 친구가 자기 어렸을 때 고향 친구가  가정요리를 배우러 다녔더니 매일 하는 음식이 아니고,

새로운 음식들도 해 준다고 자식들이 좋아한다 하더라고 우리도 배우러 가자 했습니다.

이웃 친구와 또 한 명의 이웃 사람과 셋이서 친구의 친구가 배웠다는 버스를 타고 제법 가는 다른

동네 복지관으로 갔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가정요리를 두 회차 배웠습니다.

이바지 음식은 수강자가 없어서 한 회차 강의가 없었는데, 우리가 두 번째 가정요리를 배울 때

이바지 음식 강좌가 다시 시작한 때였고, 마침 가정요리 강사님이 하시고 오후였습니다.

하루 가서 두 가지를 배우니 배워보자 하고 오전에 가정요리한 것에 찌개 반찬 한 가지 더 해서

냄비밥을 해 먹고 있다 오후 이바지 음식을 배웠습니다.

 

차사, 기제사를 오래도록 모시는 사람들이라 이바지 음식이라고 별것도 아닌데도 낯설어서

강사님 강의에 따라 하느라 쩔쩔매고 그냥 따라쟁이를 했을 뿐이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자신은 없고,  한번 더 배우고 싶었는데, 마침 이바지 강의를 연이어서 한다고 했습니다.

등록하는 수강료가 따로 있고, 실습비가 10만 원 따로 있었습니다.

 

복지 차원에서 가르치는 다른 곳에서 어떤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두 번째부터는 실습비만 받고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강사님께 혹시 (조리실 ) 테이블이 남으면 실습비만 내고 한번 더 배우고 싶다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테이블이 2개 남는다 해서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친구들 4명도 등록하게 하고,

경험 있는 우리가 한 테이블 하고 강의는 꽉 찬 상태에서 시작되었고,

한번 배운 우리는 이젠 여유가 생겨서 강의 전 재료가 배달되면 강사님이 오시기 전 재료를 각 테이블에

나누어 놓고, 배우는 도중에도 우리는 빨리 하니 처음 배우는 분들께 가르쳐 드리기도 했습니다.

끝나는 달이 연말이고 각 강좌가 모여서 하는 연말 전시회가 있고, 재료비가 너무도 적게 나온다 해서 

상관없다고 우리가 실습으로 하는 것으로 하면 된다고, 부족한 재료비에, 우리가 훨씬 많이

보태어서 그  전시회는 이바지 음식이 종류가 많게 전시되어서 보기에 흡족했습니다.

 

강사 선생님이 30대인데 레시피 종이를 파일 책에 보관한 것도 아니고  강의 날 복지관에 와서 복사를

하는데 어떤 종이는 접어진 것을 펴서 한 것도 있고,

저도 두 번째라 여유가 생겨서 컴퓨터에 새로 저가 작성해서 usb에 넣어서 복사집에서 복사를 해서

낯선 사람들이라도 같이 배운 분들께 일습을 서류봉투에 넣어서 드리고,

강사님께는 파일북에 넣어서 드렸습니다.

우리가 배운 그 이듬해에 이바지 음식 강의 중에 수박 컷팅을 새로 시작했다고 전화 연락을 해 주시면서

강의가  없는 날 직접 우리 집으로 와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 좋은 강사님은 연말 전시회에 수고해서 너무도 감사했다 하셨지요.

그때는 우리들은 8명이 모임을 하고 있었고, 각자 딸들 결혼 시에 한 번씩 다 했었고,

거절 못하는 주문도 해 주기도 했습니다.

 

한번씩 하고 나니 손주들이 태어나고 손주들 봐주는 할머니가 되고 두 번째 결혼식을 하는 딸들에게는

이바지 음식 다는 못해주고 몇 명이 모여서 폐백 음식만 해 주다가  4 사람만 지금까지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꾸고 싶은 꽃을 다 사서 할 공간도 모자라고 다 사지는 못해도, 친구들보다 더 많이 사게 됩니다.

같이 가서 같이 사는 날도 친구들은 저를 쳐다보고 덜 삽니다.

뿌리 나누기나 삽목으로 주실 거지요? 하는 것이지요.

네 사람일 뿐인데도 각자의 역할이 있어서 그 모임이 만나면 윤기 흐르는 햅쌀밥처럼 따뜻합니다.

 

7명이 하던 40년 지기 모임이 이제는 5명이 하고 있습니다.

상주로 오라고 하고 그러면 갈래 하고 그렇게 일사천리로 약속 날자가 정해지고, 시외버스로 가자 했었습니다.

그 날 저녁 뉴스부터 날로 날로 코로나 뉴스는 협박하듯 강도가 심해지더니  급기야 하루 확진자가 400여 명도

나올 수 있다고 듣는 우리들은 협박처럼 강압적인 뉴스였습니다.

협박이 아닌 현실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으니 다 같이 조심해야 할 것이지요.

 

어제 전화를 다시 걸었더니 다들 걱정을 했다 하고, 상주행은 내년으로 미루고,

가까운 시골의 친구 집으로 가겠느냐고 했더니 한 친구는 봄에도 밥 얻어먹었고, 나도 못하면서 또 밥하게 하면

미안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고마운 줄 알면 된다 각자가 형편이 맞지 않아서 그런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상주행에 같이 하지 못하니 자기 집으로 한번 놀러 오라고 했다 했지요.

11월 28일로 날을 잡았고, 그 친구는 형님들이 먼 곳까지 오시고, 나는 앉아서 모임을 하니

내가 미안하지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친구는 올해 두 번이나 자기 남편이 지나가는 길에 잠시 차를 돌리면 된다고 농산물을 보내 주기도 했습니다.

그 고마움은 제 맘 속에 있는 것이고, 또 저도 저 나름으로 그 친구를 생각해 줄 것입니다.

두번이나 어떻게..... 하는 친구에게  40여 년 지기들끼리 인정 나누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고,

이  코로나 와중에 인성도 무너지는데, 우리들의 사람됨의 격을 높이는 일이다 했습니다.

 

제 어린 시절 할머니들께서,

어느 과수댁이 혼자 살면서 절대로 남에게 신세 지지도 않고, 남에게 찬물 한 바가지도 주지 않고,

그렇게 홀로 살았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과수댁은 누구에게도 폐 끼치는 일 없이, 외롭게 살았는데 죽어서 뱀이 되었다고 하셨지요.

사람은 사람이라서 남들과도 비비대면서 살아야 하고, 양보하고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가 어린 시절 산 아버지 고향에서는 동네가 같은 성씨로 누구나가 다 친척이었고,

동네 할머니들은 다 어린 우리들을 손주처럼 대 하셨습니다

 

또 할머니 한분께서는 과수댁이 자기 옷을 떨어지면 다른 천을 대어서 바느질해서 입고 입고했는데,

죽음 옷 새로 해 입고 저승을 갔는데 자기 모습은 떨어진 옷 입은 모습인 꿈을 꾸었다 했습니다.

그 후 저승도 생전의 자기 모습이구나 싶어서 새 옷도 해 입고, 남들과도 어울려서 지냈다 하셨습니다.

 

저의 블로그 주제는 사람입니다.

사람이어서, 사람이었기에  또 사람의 품격도 있고, 인정도 나누고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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