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온 뒤 풀빛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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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요

이쁜준서 2016. 5. 27. 05:50


예전에 1950년대 6.25 전쟁 후 부산은 피난민들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 와서 악다구니로 버티고 살아 가던 시절에는

산비탈에 하꼬방을 지어서 그저 구멍이 뚤린 판자로 집을 지어서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아도 그 하꼬방이란 것이 한 채에 방 2칸

그 방한칸마다 한 세대가 살았었지 싶다.

방바닥은 세멘트포대 종이가 질겨서 세멘트 가루가 직접 묻어 있던 것은 버리고 깨끗한 종이로 방 바닥을 발랐고,

다른 벽이 있던 것도 아니고, 송판이 벽이되었는데, 그 송판은 신문지로 도배를 하고, 아마도 여름 가을까지 살았었지 싶다.

겨울 아주 추웠던 것은 전혀 기억에 없으니.

그 후에 살았던 곳은 일제점령기에 일본과 한국으로 오가는 물류를 운반하던 회사가 마르보시란 이름이었던 것이였고,

그 회사의 직원들이 살았던 집이 단지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동네를 마르보시 사택이라 불렀고, 그곳으로 이사를 가서 살았다.

국민학교 들어가지 전까지를.


도시여서 우물은 없었고, 너른마당(넓은 마당) 이라 불렀던 넓은 공터에 공동수도가 있었고, 그 물이 24시간 나오던 것이 아니어서

물을 담을만한 집안의 그릇 너댓개를 들고 나가 물이 나오기전부터 그릇도 줄 세우고, 사람도 줄 서서 여름 날 땡 볕에도

겨울 한 추위에도 줄을 서서 물을 받아다 놓고 먹었고, 그러니 물지개로 물을  집까지 가져다 주는 물장사도 있었다.

그 날의 수도공급이 끝나면 물을 받지 못했던 그릇을 자기 집으로 들고 갔고, 그 너른마당은 우리 어린아이들의 노링터가 되었다.

요령과 배짱이 좋은 사람이 순서대로 줄 서지 않고, 새치기를 하니  수도 공급이 시작 되기 전 줄을 서서 기다릴 때부터

수도공급이 끝날 때까지는 늘 싸우는 고함소리가 났고, 무지막지하게 싸웠다.

그 너른 마당에는 교회가 단독 건물로 있었고, 교회 종각에서는 일요일 큰 쇠종 소리가 일요일이면 났었다.


부산은 산 위에 하꼬방이 들어 찼는데, 마르보시 사택은 평지에 있었다.

물이 귀하던 때라 설겆이도 하고, 청소도 할 물이 필요해서  어쭈짠은 것으로 마당을 파 보았는데, 초등학생 키만큼

파니 물이 나왔고, 얼마간 파 내려 가니 모래이였고, 물맛은 건건하고 건건해서 매끄럽지는 않았어도 설겆이 청소는 할만해서

참 요긴하게 사용하기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