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물

불현듯 생각나는 것,

이쁜준서 2018. 1. 7. 06:08




TV와 쇼파와 거리가 제법 되어서 아기를 안고 TV를 보기도 한다.

아기는 아직 출생 한지 만 3달로 하루 하루 채워 가고 있는 작은 아기이다.

내 맘에 허전 한 것도 아니고,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고, 참 평온했는데, TV 화면 속 사람들이 그릇으로 보였다.

같은 시간 같이 대화하고 앉아 있거나, 같은 공간에서 자기 일을 하거나,

같은 공간이라는 것이 가족이 거실에 모여 있거나, 한 교실에 학생들이 있거나  한 사무실에 각자 책상을 놓고 있거나

같은 공간이란 말도 의미가 크고, 모여 있다는 그 형태도 가족이 거실에 모여 있거나 아주 큰 강당에 수 백명의 사람이

어느 한 사람의 강의를 듣고 있을 수도 있고,  아주 다양한 형태일 것이다.

그런데 어제 내가 처음으로 생각이 되어 진 것, 사람 사람들이 각자가 그릇으로 보였고, 그 그릇 속에 담긴 것은 각자가 다르다 싶은

그런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로봇의 지능이 사람을 능가하는 세상이다.

지금이사 아주 머리가 좋고, 그 분야를 연구에 연구를 더한 사람이 로봇을 만들었지만, 앞으로 오는 세상은 로봇에 의해서 사람이

통제를 받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유의지로 자기를 통제 할 수 있음이 제일의 가치이라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그 때도 사람 다운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먹고 사는 일에 메달려서만 우리들은 살지 못한다.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하고, 또 내가 가진 능력으로 하는 일이 있어야 사람은 살아 갈 가치를 느끼는데,

그것말고도 문화적인 것을 즐기면서 살아 가는 것이다.

문화적인 것 말고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서로 양보하고 도와주고 하는 친교도 살아가는 여유이다.


내가 좋아 하는 꽃을 키우는 여유도, 즐길 여유도 있고, 공부하는 것도 있고, 친구들과 맘 나누는 것도 있고,

자식들도 성실하게 살고 있고, 손주 준서도 잘 자라고 있고, 출생 후 3달을 나날이 채워 나가는 아기도 있고,

내 가족들이 건강하게 잘 살아 나가고 있다.

그런데도 문득문득, 또는 불현듯이 부질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이면?

그릇의 모양이나 색이 달라도 사람이란 그릇에 담긴 것이라 해도?

결국 사람이라도 죽고,

그릇에 담긴 것이라도 그 그릇은 깨어질 것이다.

살아가고 있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의 경계선이 모호 해 진다.